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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호'라고 불리운 남자

    뿌린 만큼 거두는 먹는 장사

  '먹는 장사.' 여러분들은 이 단어만 들어도 왠지 천박하거나 쉬워 보이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식당집 아저씨'란 단어 역시 그리 고상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 '밥장사.' 이건 더더욱 안 

좋은 냄새가 난다. 이러한 느낌이 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의 의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졸업을 

하자마자 식당을 한다고 나서면 그 집 식구들은 물론 주위의 친지까지 다들 한마디 하고 나설 

것이다. "그래 기껏 대학공부 시켜놨더니 겨우 식당이냐?" 혹은 "세월이 아깝지도 않냐?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냐고?" 무리하게 추측하지 않아도, 아마 이 정도의 반발은 능히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나 대학 나온 사람들이 다 넥타이 메고 다 컴퓨터 앞에 앉으려 들면, 그 인텔리 직장인 

점심은 누가 만들며, 오랜만에 애인과 데이트 길에 나설 때, 멋진 레스토랑의 근사한 식사는 누가 

다 준비하랴? 요즘 세상에 대학 나온 사람 다 빼고, 집안 좋은 사람 다 빼고, 잘난 사람 다 빼면 

남는 게 사람이랴?

  정말 우스운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대학을 예비직장으로 알고 달려가는 젊은이들도 문제지만 대학을 못 가면 인간대접 받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걷잡을 수 없는 피해의식이 더 큰 병이다.

  지난 시절 우리 사회는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사무실 책상 하나 내주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며 앞으로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나온 사람은 

고상한(그리 고상할 것도 없지만) 직장엘 가야 한다는 이 논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좋은 사업

  먹는 장사는 참으로 고귀하고 순수하며 사명감 있는 사업임에 틀림없다. 맹물로 가는 차 

없듯이, 기름 없이 가는 차는 상상할 수 없듯이, 밥 못 먹는 사람이 숨쉴 수 있는가?

  먹는 장사는 곧 생명을 보장해주는 고귀하고도 사명감 있는 사업임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순순하고 정의감 있는 사업이 도 어디 있단 말인가? 본인이 이 장사를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정말 좋은 사업이다.

    먹는 장사를 하자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고 내 집으로 손님을 모셔 그 음식을 대접하고, 또 그 손님들은 나의 

노고를 약정된 돈으로 지불하고, 난 그 돈으로 그 다음날을 준ㅂ하고... 얼마나 정겨운 내용인가? 

나는 감히 외치고 싶다.

  젊은이들이여! 먹는 장사를 하자. 그 젊음, 그 기지, 그 참신한 지혜를 가지고 내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즐거움을 나눠주고, 내 노동의 대가가 늘어남을 기뻐하는 도시의 농부가 되자, 

농부들은 말한다. 땅은 정직하다고, 심은 만큼 돌려준다고. 도시의 농부들도 말한다. 음식은 

정직하다고, 땀흘리고 신경쓴 만큼 되돌려준다고....

  먹는 장사는 자기가 가진 지혜를 쏟아 부음으로 해서 그 결과가 놀라우리 만큼 정확하게 

표현되고 그 대가는 엄청난 보답을 한다. 물론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찾는 보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업처럼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능력을 과시하기 좋은 직업은 그리 흔치 않다. 

음식업은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고 아우성칠 필요도 없으며 음모와 계략으로 빠른 성장을 도모할 

이유도 없다. 물론 모든 직장인이나 다른 사업을 진행하는 이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원한다. 도시의 잘생기고 예의바르고 총명한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참신한 아이템을 

가지고 우리의 거리를 화려하게 꾸며줄 날을... 기묘하고 멋진 가게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 있어 

어느 식당을 가도 색다른 분위기와 음식이 기다려준다고 상상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마음의 축복을 보낸다.

    꿈 이야기

  나에겐 꿈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크기에 차이는 없겠지만 꿈은 있게 마련이다. 그 꿈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주 

모양을 바꾸지만, 간혹 처음의 꿈이 그대로 간직되는 경우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나의 어릴 적 꿈은 가수

  나의 경우 역시 어릴 적 꿈과 지금의 꿈은 변해 있지만, 그것은 나의 마음이 변질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한 모양 바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나의 어릴 적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공부를 딱 싫어하던 나는 유독 노래부르기를 좋아했고 춤추기를 즐겼다. 내 초등학교 시절엔 

남진, 나훈아, 하춘화, 문주란 등의 가수들이 유명했으며, 특히 남진과 나훈아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 나훈아가 쇼를 하면 며칠 후엔 건너편 극장에서 남진 리사이틀이 열리곤 했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는 쇼를 구경할 돈이 모자라면 어떻게 돈을 모을까 하는 궁리에 젖어 며칠을 

고민하곤 했다. 궁리 끝에 방법이 나오지 않을 땐 극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빠방'이라는 방법이었다.

    똥통을 통해 몰래 보는 쇼



  '빠방'이라는 말은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들어가는 행위를 일컫는 일종의 은어였다. 그 '빠방'의 

방법은 목표로한 극장의 건물구조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특히 그때의 극장 화장실은 

지금처럼 수세식이 아니고 긴 막대기 끝에 군대에서 쓰던 철모나 깡통 등을 매달아서 그걸로 

똥을 푸는 재래식이었기에 똥을 저장하는 탱크로 들어가 똥누는 변기 위로 빠져나오는(물론 

겨울이 아니면 이 방법은 불가능했다. 똥 속에 잠수는 못하니까) 방법에서부터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사정해서 그 어른의 손을 잡고 마치 아들인 양 시침떼고 들어가는 방법(이 

방법은 얼마 후엔 얼굴이 알려져서 거의 불가능했음), 또는 1미터 조금 넘는 기도석(표 받는 곳) 

밑으로 바짝 붙어 기어가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극장에 들어갔다가  들키는 날은 이마에 빨간 페인트로 '빠방'이라고  쓰고 온종

일 

극장 청소를 했으며 동네어른들이 그걸 보고 부모님께 이르는 날은 그야말로 '눈물로 이 

밤을'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마에 찍힌 주홍글씨를 지우던 노력은 지금도 새삼 지겨움으로 남는다.

  여하튼 그러한 쇼를 보고 오는 날이면 끼니도 미룬 채 거울 앞에 서서 그날 눈여겨봐 두었던 

가수의 제스처를 흉내내며 열심히 그 가수의 노래를 불러보곤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 소풍 때면 으레 단골가수가 되곤 했다.

    대성황을 이룬 보컬그룹 worlds

  그러다가 그러한 열망은 드디어 말썽 많이 부리던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음악에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worlds라는 보컬그룹을 만들게 했다. 그 첫 번째 공연은 그 당시 청소년회관 2층에서 

'불우이웃돕기'라는 제명 아래 음악 발표회를 했고., 2회는 대전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3회는 

지금은 없어진 대전 대흥동 자유극장에서 열렸었는데 그때(76∼77년)만 해도 학생들의 

휴식문화가 전무한 상태에다 보컬그룹이라는 생소함까지 겹쳐 매회 마다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일례로 그때 마침 대전역 앞 아카데미극장에선 하춘화 쇼가 있었고, 자유극장에서는 worlds의 

세 번째 공연이 있었는데 하춘화쇼를 하는 아카데미극장은 반쯤 객석이 차있었고 자유극장 앞은 

채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도로에 밀려 급기야는 몇 명의 교통순경까지 동원되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3회 공연 때는 무대에 올라보니 준비해놓은 마이크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들이 아침조회 때 

쓰는 'ㄱ자형' 약장수 마이크였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시간은 이미 약속한 시간에서 무려 30분 

이상이 지나 더 어찌해 볼 겨를이 없었다. 한두 곡이 끝날 즘 안 들린다고 아우성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대여섯 곡이 나갈 무렵엔 뒷부분의 관객들이 앞으로 나오려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깔리고 밀리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는 불상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음만 나오는 추억으로 남는다. 여하튼 그러한 성원에도 불구하고 

worlds는 그 3회 공연을 끝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됐는데, 그때는 젊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했던 대인지라 공연장소를 빌리는 것을 시작으로 연습장비, 연습장소, 연습기간 동안 의 

경비, 부모님들의 무차별한 만류 등등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다. 

    닭서리

  언제인지는 뚜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연습도중 하도 허기가 져서 동네에 밤잠 안 나고 노니는 

닭을 느닷없이 발로 걷어차 실신시킨 다음 끓는 물에 펄펄 끓여 소금도 없이 여러놈이 달라붙어 

뼈만 남겼다. 먹고 난 뼈는 증거인멸을 해서 진놈이 모래를 묻혀 싹싹 닦아 기름기를 없앴다. 

오랜만의 포만감을 즐기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던 우리는 벼락치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었다. 

  그리고는 모두 끌려갔다. 파출소로...

  아니라고, 모른다고 도리질하던 우리들은 수채망에 걸려 잇던 닭털이라며 득의 만만해 하는 

뒷집 여자에게 결국 거금 2만원을 바치고, 각서 쓰고 풀려났다. 그때 돈 2만원이면, 닭 20마리는 

살 수 잇는 값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비싼 닭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79년 가을, 대전 최초로 고고 클럽이 탄생했다. '사모니'라는 이름의 그 

클럽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그 당시 중앙관광호텔 6층 미드나이트, 9층 킹돔나이트클럽, 

유성관광호텔 속리산관광호텔, 청주,부산의 몇몇 클럽 등등에서 2년여 동안 음악활동을 하다가 

입영통지를 받고 군에 입대하게 됐다.

  그때는 별로 이름이 없었지만 지금은 독자들도 알만한 연예인들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밤무대의 크고 작은 이야기 등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그 이야기를 다 하기엔 이 

책의 정해진 지면이 허락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필자가 글을 쓰게 된 취지에 혼선이 올 것 같아 

그냥 지나침이 못내 아쉽다.

    군발이 달호



  군에 입대하던 날은 날씨마저 썰렁하여  무척이나 울적했다. 집결지인 충무체육관이 꼭 도살장 

같았다. 박박 밀은 머리가 늦가을 바람에 시려웠는지 아님 어색했는지 모두들 방울 달린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유독 나만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그들 속에 서성거렸다. 아는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애꿎은 담배들만 죽이고 있었다.

  지금은 유명한 개그맨이 된 최병서가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따라 권했다. 그는 나의 학교 

후배이자 절친한 후배였다. 그런 관계로 그와는 많은 기억들이 있는데, 그 중 몇가지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이 나곤 한다.

  워낙 붙임성이 좋고 쾌활했던 그는 어쩌면 유명 개그맨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확실치는 

않지만 학창시절 응원단장이던 내 뒤를 그가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내가 외제옷 장사를 하던 백화점 가게에서 개그맨 콘테스트를 대비해 

연습을 했고., 나는 대화장인 서울로 쫓아가 응원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절친했던 그와 지금은 연락도 없이 지낼뿐더러 수년 전 우연히 서울 풍전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달갑지 않은 얼굴로 서로 어색한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우리가 그렇게 

된 이유에서 나는 최병서의 괜찮은 인간미를 보았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가게를 찾아온 병서는 심각한 얼굴로 "태호형이 죽었대." 했다.

  그러자 나는 "태호가 죽다니? 아니 무슨 일로?" 하니 "아니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태호형 

나이가 몇인데." 하며 벌컥 화를 내자 나도 화가 나서 "야 임마, 나도 친구니까 그렇지. 그럼 

뭐라고 하는 건데 00야!" 하자 어이없다는 듯 입벌리고 쳐다보다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 후론 

그가 날 찾지 않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동명이인이었다. 지금까지도 병서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이 글보고 풀었음 싶다. 여하튼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들은 아버지 회사의 부도소식

나는 광주에 있는 상무대 욱군포병학교의 조교로 근무하게 됐는데 그럭저럭 사연 많은 군생활에 

익숙해지던 일병시절부터 들랴오는 집안소식이 심상치가 않았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있음이 

느껴졌다. 군 입대 전까진 그래도 대전에선 내노라 하던 부잣집이었기에 구태여 세상물정에 대해 

그리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나는 점점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군에 입대할 

당시만 해도 군 입대를 모면할 방편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 멋대로 누구의 제약 없이 

살아온 나날에 변화를 원했으며 내 인내의 한계를 느껴보고 싶었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게 멋있는 제목으로 사서 고생하러 왔는데 이거 

잘못되면 제대 후엔 평생 고생하게 될 판이니 어찌 고민되지 않겠는가!

  드디어 상병 달고 군생활이 저물어갈 즈음에는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오류동 공장부지에 

방을 여러 칸 들어 월세를 받아 생활하게 됐고, 여유롭지 않을 생활을 돕고자 어머님이 방앗간을 

하시게 됐다는 동생의 얘기를 듣고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날 밤 유난히 달이 밝던 부대의 정문초소에서 보초를 서며 지난날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지지리도 공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그래도 자식이라고 아버지께선 우리 학교에 유일하게 

가죽부추를 ㅁ추어주셨고 학교에 피아노까지 들여놓으시며 육성회장을 맡아주셨지. 선생님들도 

지지리도 공부 못하고 말썽만 피우는 놈을 아버지 얼굴 하나 보고 억지 칭찬을 해주셨다.

 '아!, 난 왜 이리도 못난 놈인가!'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 꼬시는 데는 천재




  어릴 적부터 난 유난히 욕심이 많았다. 나에겐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사촌형제들이 몇 명 있었

다. 집안 경사 때 가끔 그들과 만나면  슬슬 날 피했다. 워낙 욕심이 많고 사나운지라  같이 무슨 

일을 도모해서 득될 게 없으리란 판단들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나의 유혹에 

빠졌고, 또 그 결과는 그들이 염려하던 대로 돼버리곤 했다.

  나의 그 많은 만행들을 다 열거하려면 이 책은 5편가지 이어져야 한다. 어머님이 그러셨다. "조

선천지에 너 같은 놈 또 어디 있으랴." 대여설 살 때엔  하도 자주 없어져 내 옷마다  주소와 전

화번호를 적어서 꿰매놓으셨단다. 길에서 놀다가 조금만 이상한 차가  나타나면 죽어라 달려갔다. 

한참을 뛰다보면 어디로 왔는지도 모르겠고 결국은 파출소에서 순경님들 자장면이나 축내고 곤봉 

휘두르며 놀다가 유리창이나 깨고, 아니면 낯모르는 집  안방에서 8자로 잠들었다는 연락을 받고 

온 어머님이 집으로 나르곤 했다. 별일 없는 날은 자기 키보다 더 큰 개를 끌고 와서는 누가 

줬다

고 박박 우기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개를 좋아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한 만행은 중고등학교시절에도 이어져 숱한 싸움과  사건 속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내

가 없는 늦은 시각에 전화가 울리면 어머니는 말부터 더듬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맞은 놈 돈 물

어줘 파출소로, 경찰서로 치고 달리고...

    회고의 눈물을 흘리며

  언젠가는 간첨으로까지 몰려 우리 집보다 더  큰 방첩부대차가 오질 않나(나중에  알고 보니 

모 여학생의 부탁으로 써준 웅변원고가 잘못 이해되어 생긴 소동이었음), 내 시계 내놓으라고 

여학생이 집에 찾아오질 않나, 학교에서는 퇴학시킨다고 연락 오고, 학교 가서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돌아오면, 내일 놓을 어머니 겟돈을 들고 도망갔다.

  돌이켜보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남으셨나 싶다.  음악생활 할 때도 노래가 잘 안

되면 다음 스테이지고 뭐고 간에 그냥 내려와 돌아다니다가 무대로 돌아가면 경음 악연주로 시간

을 때우던 동료들이 펄펄 뛴다.

  다시 무대에 올라 한두 곡 불러봐도 시원치 않으면 막공갈팝송 부르고 욕도 했다.(물론 음악이 

시끄러운 때에만), 그런 줄도 모르고 손님들은 즐겁게 춤추고  오예오예 어쩌구 난리통이다. 그래 

그래, 다 좋은데 이젠 워쩐다냐. 뭐해서 먹고 살지?

  보초근무를 끝내고 막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걸으며, 지난날 기억들을 더듬던  나는 땀내 절은 

작업복에서 M-16소총을 맹 스물두 살, 살아갈 날이 한참 남은 젊은 머슴아로 되돌아왔다.

    이젠 워쩐다냐?

  그날 밤 종일 근무 속에 여느날 같으면 머리를 바닥에 대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졌을 시간인데도 

눈이 말똥말똥, 머릿속엔 별의별 것들이 다 날아다니고  귀에서는 천둥, 벼락, 세상을 프라이팬에 

지지고 볶는 소리로 인해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았다.

  징그럽게도 일어나기 싫은 아침, 그래도 제목은 희망찬 새아침, 찌그러진 세숫대야를 들고 우물

장에 내려가다 보니 아직도 아침의 서운한 눈곱들의 방해로 사람이 이중삼중 제멋 대로다.

  그대로 나의 모든 만행들을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묵묵히 감수했던 그들, 내가 생각해도 징그

러운 나를 아들이라고, 형이라고, 마냥 용서로 일관한 나의 식구들... 그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그

들이 어려움 속에 빠진 거다. 이젠 내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래 나도 뭔가 보여줘야 된다. 나

라고 하구한 날 나쁜 짓만  일삼는, 자기인생 들기기에 급급한 그런  놈팡이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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