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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혹 크게 성공한 사람의 자서전으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는데 거듭 밝히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도한 현재 큰 

부자도 아니다. 다만 나의 처지를 비추어볼 때 다소 만족할 만한 현실임은 굳이 숨길 마음이 

없다.

  난 소설가도 아니고 유명인사는 더더욱 아니기에 내 책이 어떤 문학적 차원에서 평가되고, 

이론상 이치가 맞지 않는다고 얘기되는걸 원치 않는다.

  난 단지 한 명의 장사꾼이요, 장사꾼이 되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 한 

사람의 경험일지라도 여러 사람에게 참고가 되고 지침이 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더할나위없는 

행복이요, 우리 가문으로서도 커다란 영광이기에 아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써 봤을 뿐이다.

  이 책은 교과서도 아니요, 자서전도 아닌 한 장사꾼의 내 이웃에 대한 조언이요, 경험담이요, 

충고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보통사람들'

  '보통사람들'이라는 글자는 나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글자이며, 고마운 글자이다. 나는 이 

식당으로 인해 많은 여유로움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보다 성장한 인격을 갖출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온갖 회한이 서린 나의 역사다.

    뭐 맛이 없다구?-조바심에 잠을 설치며

  1985년 5월 '보통사람들'이  처음으로 문을 여느 날,  난 마치 미친 말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전날 왁스를 발라놓은 바닥의 윤기가 마음에 안 들어 봉걸레를 들고 닦고 또 닦았다.

  화장실 타일에 묻은 검은 페인트 두세 방울을 지우느라 진땀을 흘렸고, 양념통 하나하나를 

윤이 나도록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음악의 크기를 조절하고 가게 앞을 말끔히 쓸어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댄 마치 시험결과를 발표할 때처럼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마르고 긴장되었다.

  주방으로, 홀로, 계산대로 왔다 갔다 하며 도와주는 안 식구와 두 명의 주방직원들,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개업을 맞이했다. 첫날이라 당황도 했지만, 음식맛이 없다는 말이 나오자 나는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날 저녁 쫄면장을 다시 만들어봤다. 이것도 넣어보고 저것도 섞어보고, 한두 시간 가량 

시간이 지나자 제법 그럴듯한 맛이 났다. 그 다음날 첫날보다 많이 보완된 주방음식들은 곧 

손님들의 맛있다라는 반응을 끄집어냈다. 





  나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계산대에서 음식값을 지불하고 밝은 얼굴로 문을 나서는 

손님들이 늘어갔다. 오는 손님마다 가게 분위기가 좋다,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젠 된거야.' 개업 전날의 조바심에 잠을 설쳤던 

수많은 밤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친다.

    실내장식 본인의 소신도 다소 필요하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매상은 자꾸 올라가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낀 어느 가을날 

아침에 나는 가게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두세 달 전의 나를 생각해보았다.

  실내장식업자는 나의 끝없는 간섭에 굉장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나는 

많은 부분을 내 생각대로 요구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인테리어업자의 고정관념과 자기 과신을 우려한다. 실내장식이란 정해진 

방법이 없다. 그 업소가 요구하는 고개그이 수준 및 연령 등을 고려해야 하며 그 점포의 생김새, 

주변과의 조화 등을 참작해야 하는 참으로 어렵고도 예민한 작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소재가 없기 때문인지 대충 눈짐작과 어렴풋한 지식으로 작업을 맡고 있는 

실내장식업자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업자들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문제점을 우리는 수시로 목격할 수 있다. 뒤에 또다시 

언급되겠지만 이 실내장식은 정해진 가격도 없지만 그때 그때의 상황에 다라 가격이 움직이는 

성격을 갖고 있기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의 정당성도, 재료의 단가도, 작업의 소요기일도 

파악하기 어렵고, 사전에 업자와의 약속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실현되기란 열에 한둘인 것이다.

  그것은 실내장식업자가 꼭 부도덕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실내장식이라는 작업 자체가 그만큼 

가변적이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자주 발생할 소지가 크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실내장식업자의 선정이란 대단히 어려우며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러 명의 업자 중에는 자신의 작업에 혼신의 정열로 마치 예술품을 대하듯 

자신의 감각을 쏟아 붓는 장인정신을 가진 업자도 간혹 있었다. 이들은 최소한의 대가만을 

요구하며 자신의 간간이 살아 표현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는데 그 모습은 보는 이의 

입장에서 참으로 감격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어쨌든 시설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거론토록 하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유치원 아이들 그림으로 벽을 장식

  시설업자의 편치 않은 눈길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설을 내 생각대로 진행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실내가 훤히 보이는 유리로 전면을 붙인 식당이 한 군데도 없었기에 통유리를 끼우고 

사무실에서만 쓰던 블라인드를 달았다. 등받이가 없는 2인용 의자를 만들어 홈을 파고 다이미를 

끼웠다.

  가게 폭이 좁아서 붙박이 의자로 한쪽 벽면을 채웠다. 그것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받으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4인용 의자로 빽빽이 채워진 기존 식당들의 흐름이 싫었기 때문이다.

  천장에는 형광등을 달고 양옆의 형광등 위는 노란 아크릴박스를 입혀서 저녁이면 가운데 

노출형광 등을 끄고 아크릴 안의 형광등만 켜니 홀 안이 노란 색으로 보여 아주  분위기가 

있었다(그것은 다른 조명을 쓰는 것보다 효과가 컸으며 전기세 절감에도 한몫했다). 스피커를 

화장실(대변기 위쪽 천장 속)에도 설치, 화장실 벽면의 그림액자와 함께 짧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유도했으며(분식집으로 아마 한국 최초?). 아이들 그림은 왠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치원생들의 그림을 벽면에 걸어두니 손님들이 굉장히 재미있어했다.

    손님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양심적인 상술

  크리스마스 때는 그때만 해도 흔치 않던 컴퓨터로 손님의 이름을 입력해 프린터로 뽑아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었으며 여자 단골손님에게는 스타킹을 한 족씩 선물했다. 다른 식당들은 

식사 후에 껌을 주었으므로, 식상한 손님들을 위해 박하사탕을 주었고, 여름에는 각종 화채(수박, 

복숭아, 포도)를 만들어 원가에 판매함으로써 조그마한 불평도 안 한 번 소홀히 대한 적 없이 

즉시 시정해서 그 손님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손님이 놓고 간 물건을 기재해 가게 전면에 부착해서 찾아가도록 했으며 전화요금(우리 가게는 

공중정화가 없었다)도 다른 가게에선 모두 50원 받을 때 20원을 받았다. 그것은 50원을 받게 되면 

전화요금을 지불하고도 돈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천장에 붙은 아크릴박스 위에 삼국지에 나오는 떡장수 '무대' 얼굴을(고우영 삽화) 

그려 놓았는데 그것은 무대처럼 양심적이고, 타산적이지 않은 장사를 하겠다는 일종의 

자기암시였다.

  그렇게 무던히 노력한 끝에 저금통장의 액수는 자구 불어났고 단골손님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식사시간에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손님들이 문 앞에 몇 팀씩 버티고 있어 

미안한 마음에 문 밖 나서기가 어려웠다.

    어디 그래, 한 번 해보자

  개업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라고 기억된다. 배달한 콩국수 재료가 마음에 안 차 전날부터 콩을 

불려 아침 일찍 오토바이를 타고 방앗간으로 향했다.



  콩국을 만들어 돌아오는 길에 급하게 다가오는 트럭에 신경이 쓰여 도로에 난 흠을 못 보는 

바람에 콩국을 반통이나 온몸에 뒤집어썼다.

  그때 옆을 지나치던 중년신사의 양복에도 몇 방울이 튀었는데 그 양반이 옷을 털며 나를 

쳐다보는 얼굴이 꼭 부잣집 마나님이 동냥하는 거지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허연 회칠을 한 듯한 

얼굴이 보기 좋지는 않았겠지만, 그때 난 참으로 참담했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갑자기 오토바이고 콩국이고 다 집어던지고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통을 

추스르고 오토바이의 안장을 닦아낼 때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처럼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어디 그래, 한 번 해보다."

    그 이후

  '보통 사람들'이 문을 연지도 일 년 반이 넘어서고 있었다. 가게를 시작할 때 여기저기서 

융통했던 돈들을 다 갚고도 6천여만 원의 돈이 통장에 들어 있었고 가게의 수익도 매일매일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수익금을 들고 아내와 가게 근처의 은행에 들러 입금을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 하며 시작하는 일과는 지금 생각해도 무척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사업에 도전!

  절박했던 시점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자 나는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마침 제대하고 복학 전인 

동생이 있었고 아내가 있었기에 '보통사람들'은 그들의 손에 맡기고, 나는 새로운 수익을 얻기 

위해 선화동에 있는 기독교 봉사회관의 지하(약 120평)를 임대해 커피숍을 차렸고, 그 얼마 

후에는 청주 시내에 '엄주사 city'라는 양분식점을 차렸다.

  그 뒤로는 크레송, 노스트라, 워모 대리점을 거치며 롯데관광 대전지점, 훼밀리카드 주식회사 

등등 쉬지 않고 사업을 벌려나갔다.

  뒤돌아보면 다행히 큰 실패를 한 사업은 없었다. 그렇다고 큰돈을 벌지도 못했다. 다만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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